모두의 혁명법 1 ~ 2
# 발췌 : 신승철. [모두의 혁명법] (알렙, 2019)
* 기계 : 가타리는 기계 개념을 다시 정립하는데, 모든 주체적 움직임을 틀지우는 구조 개념에 대항하여, 그는 이른바 '구조'라고 하는 것은 사실상 다양한 부품들이 조립되어서 작동하는 것으로 보았다. 정신적인 것이나 무의식적인 것 등도 특정한 모델에 묶인 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향에서 다양한 다른 것과 접속하면서 움직인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 기계적(machinique)라는 말을 사용한다. 결정론적인 의미에서의 기계학(mecanisme)이 아닌, 기계적 작동(반복)을 강조하기 위해 기계론(machinisme)을 내세운다. 기계론의 기계들은 접속에 초점을 맞추고, 그래서 서로 밀어내고 선택하고 배제하는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지만, 기계학은 상대적으로 폐쇄적이고 외부 흐름과 단절된 코드화된 관계만을 지닌다. 넓은 의미에서 기계는 기술적 기계 뿐만 아니라, 이론적, 사회적, 예술적 기계를 포함하는데, 고립되어서 작동하지 않고, 집합적 배치로 작동한다.
1 : '욕망을 조만간 사라질 주체적 상부구조로 생각하지 마라'
.. 우리는 소수자 운동의 전략적인 지도 제작을 수행할 필요가 있다. 무엇으로 해야 할까? 우리는 끊임없이 말할 것이며, 노래할 것이며, 춤울 것이며, 발언할 것이다. 우리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적과 아의 대립 전선이라는 몰(mole)적인 사유 방식이 아리나, 횡단하고 이행하는 욕망의 지도 그리기에 주목할 것이다. 그러므로 소수자 운동은 새로운 판을 짜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관계망과 배치, 집단적 배열 장치가 되어야 한다..
.. 의미는 권력이며, 마치 문제 제기에 대한 답을 갖고 있는 전문가 유형의 날렵하고 현학적이며 문제를 뻔하게 속물적으로 보는 태도를 취하게 만든다..
.. 욕망은 기원, 목적, 동기, 이유 등을 묻고 정의하려는 순간 달아나고 탈주한다..
.. 오늘날 민중이라는 대지는 부서지고 침식되고 침윤되어 버렸다. 낭만적인 개념이 되어버린 것이다. 대지 위에 발 딛고 서지 못한 수많은 외롭고 고독한 사람들의 절규와 아우성, 잉여가 들리는 시대이다. 소수자운동은 자신의 작은 땅뙈기 영토 위에 낭만적인 민중처럼 연대할 수록 같아지는 구도가 아니라, 연대할 수록 다라지고 다양해지는 색다른 구도를 그릴 것이다. 소수자운동은 혁명적 낙관주의를 꿈꾸게 한다. 그래서 가타리가 혁명에 관한 한 자신은 행복하다고 하지 않았나? 혁명 운동도 없고, 혁명가도 없을지라도 도처에 혁명이 있을 것이기에, 지금 여기서 혁명을 하자고 말하지 않았던가..
.. 물리학에서의 에너지가 물질이 되는 특이점(singularity)과 같이 욕망과 열망은 미래와 대안과 제도를 돌연변이의 발생처럼 만들어 낸다..
.. 욕망은 '1+1=2'라는 식의 함수론이 갖는 자본주의의 원리, 중력의 원리, 계산의 원리에 따라 작동하지 않는다. 그리고 '특이점'은 확률론이 함수론이 될 수 있다는 상상력, 즉 아인슈타인의 통일장 이론과 정반대편에 선 양자역학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 중앙으로의 집중을 방해하는 아이의 울음소리는 놀랍다. 의미로의 수렴을 거부하는 난해한 음악은 아름답다..
" 욕망은 일단 권력의 감시에서 벗어나면 현 체제의 계획자들과 행정가들이 지닌 미쳐 날뛰는 합리주의보다 더욱 현실적이고 현실주의적인 더욱 훌륭한 조직가이자 더 능숙한 엔지니어로 드러난다. 과학, 혁신, 창조는 기술관료의 의사합리주의에서가 아니라 욕망에서 증식한다."
- 펠릭스 가타리, 윤수종 옮김, [분자혁명](푸른 숲, 1998) 278p.
.. 욕망은 의미화, 표상화, 모델화를 해대는 전문가주의와는 정반대로 아마추어들, 왕초보, 신출내기들이다. 다시 말해, 욕망은 의미(=권력)의 논리가 몰락하고 파괴하는 순간에만 작동한다.. 욕망은 문제제기와 대답이 분열되어 있으며 둘 사이에 딱 일치하는 면이 없다. 이러한 분열의 지점에서 흐름이 발생한다..
.. 욕망이 상부구조라는 '의미의 구조물'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해 두자.. 소수자운동의 전략처럼 재의미화에 따라 과거의 조각들을 조립하고 연결할 것이다.. 르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반역]에 나오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구는 언어와 이미지를 연결하는 표상화를 반역하는 작품이다. 상징적인 것으로 문법화되고 규범화된 표상화의 방식에서 벗어나, 비표상적이고 비형상적인 욕망의 흐름을 재발견할 필요가 있다..
.. 사람들이 TV 앞에서 달콤한 졸음 속에 빠져드는 것은 결국 표상화의 상징질서에 포획되기 시작했다는 가장 손쉬운 증거이기도 하다. 욕망은 이미지와 의미를 꿰맞추는 이미지-영상의 진부한 거울놀이나 그림자놀이를 거부한다. 그런 의미에서 욕망은 비표상적인 흐름이다.. 욕망은 여러 표상, 여러 모델, 여러 의미를 횡단하는 흐름이다.. 단 하나의 이미지와 표상에 단 하나의 의미가 꼭 맞아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런 것들이 고장 나고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욕망은 생성된다.(발견된다.).. 욕망은 과거-현재-미래를 가로질러 횡단하며, 학교, 가족, 시설, 단체, 공동체 등의 배치를 횡단하며 비스듬히 흐른다. 횡단하는 비스듬한 운동이 만드는 우발성과 사건성, 특이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 : 욕망을 하부구조 쪽으로 보내고 가족, 나, 그리고 사람을 반생산 쪽으로 보내라.
.. 동시에 모든 사람이 각각 다른 욕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욕망은 하나의 모델이 아닌 메타모델이라는 점에서 공동체 역시 설명할 수 있다. 천 명의 사람이 있다면 천 개의 욕망이 서식하며 천 개 혹은 그 이상의 공동체가 만들어 진다. 다양한 욕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욕망의 생태계 속에서 미처 생각지도 못한 색다른 욕망을 만들어 내는 것이 중요하다. 각각의 욕망이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접속되어 새로운 욕망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 빌헬름 라이히는 욕망이 신체로부터 기원을 갖는 생명 에너지이자 우주로부터 기원한 에너지라는 점을 발견한다..욕망을 우주와 태양에서 기원을 갖는 생명에너지로 보는 라이히의 관점은 가타리의 이론의 주춧돌이 되었다. 그것은 가타리에 이르러서는 신체-욕망에서 기호-욕망으로 이행하면서, 기호에 따라 변이되는 에너지관으로 바뀐다. 여기에는 복잡성, 다양성, 횡단성 등이 적용된다.
.. 기호는 상징계, 권력적인 의미작용, 고정관념으로서의 기표와 같은 지배적인 기호작동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그래서 기호의 의미작용을 모두 권력으로 바라볼 위험도 상존한다. 그러나 생명과 자연의 기호작용이 우리의 내부에 들어와 있다. 비기표적 기호계인 냄새, 색체, 음향, 몸짓, 표정, 맛 등의 향연이 우리의 내재적인 욕망을 표현할 수 있는 기호적 수단임에 분명하다. 동시에 그러한 비기표적 기호계가 고도화되고 추상화될 때 도표(diagram)가 만들어질 수 있다.. 도표의 관점에서 볼 때 권력의 의미작용만이 고도로 조직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을 이루는 냄새, 색채, 음향, 몸짓, 표정, 맛 등의 구성 요소들이 고도로 조직될 수 있다. 도표라는 기호의 특이점에 따라 완전히 다른 세상이 창조될 수 있다. 즉, 기표라는 자본주의적인 고정관념에 파열구를 낼 우리 안에 생명과 자연의 도표작용이 있다. n분절의 기호작용인 도표라는 하나의 파문이 잇달아 도미노 작용처럼 지배적 기호계를 무너 뜨릴 수 있는 것이다..
.. 우리가 원하는 것이나 열망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을 다시 한 번 해 보고 계속 반복(=기계)하고 싶은 생각이 자연스럽게 든다.. 생산 자체가 네트워크의 형상과 떨어질 수 없는 탈근대 자본주의하에서, 네트워크의 노드와 매듭, 지절에서 연결 접속을 수행하는 작은 모듈 단위 혹은 단자 하나를 '욕망하는 기계'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욕망하는 기계는 너와 나, 그로 지칭되는 정체성이 아니라, 욕망의 흐름에 따라 반복이 설립되는 사이주체성 즉, '우리 중 어느 누군가'이다. 혹은 그것이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네트워크와 공동체, 생태계와 같은 관계망 속에서 연결 접속되는 수많은 인간들/ 비인간들은 욕망을 통해서 반복을 설립하고 기계적으로 작동한다. 이제 생산은 연결 접속과 구분되지 않는 상황이 된다. 그래서 접속, 이접, 연접이라는 연결 방식에 따라 욕망하는 기계는 달리 움직이고 재규정되며 재창조된다..
.. 사회적 생산이 욕망하는 생산의 혁명적이고 생산적인 역할에 주목한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코드의 잉여가치(surplus of code)가 바로 그것인데, 공동체적 관계망이 만드는 시너지 효과를 탐내는 것으로 출발점이 생겨 버린다. '생태적 지혜', '집단지성', '공유자산', '공통의 아이디어' 등의 공동체적 관계망이 만드는 시너지 효과를 코드의 잉여가치는 자본화하는 행동으로 부터 출발한다. 문화 예술의 활성화와 마을 만들기, 공동체 운동 등이 성숙해 갈 때, 임대업자들이 임대료를 올리는 기회로 삼는 젠트리피케이션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된다..
.. 생산적이어야 할 것은 자연과 생명으로부터 유래한 욕망노동, 정동노동, 돌봄노동 등의 영역이지만, 생산으로부터 격리시켜야 할 부분이 있다. 즉, 끊임없이 자아로 고정되고, 아버지의 아들로 고정되고, 인간중심주의로 고정되어야 할 영역이 그것이다. 가족, 나, 사람을 반생산 쪽으로 보내는 것은 정체성, 인격, 인간성, 역할 모델, 기능적 직분에 대한 사보타지(sabotage)를 의미한다. 대신 공동체적 관계망 속에서 작동하는 사이주체성이나 네트워크 속에서의 '욕망하는 기계'의 연결접속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특정 개인들이나 원자화되어 있는 개인, 정체성이 확실한 사람들, 가족 내에서 자리 잡은 인물 등에 대해서 철저히 반생산의 영역으로 만들어 버릴 필요가 있다..
.. "내가 해냈다", "이걸 해내는 인간이 중심이다", "나는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등의 발언에 대해 의심해 봐야 한다. 생태계, 공동체, 네트워크에서의 작동은 관계망의 배치 속에서 '우리 중 누군가'를 만들어 낸다. (단일한 개체로 지정할 수가 없다.) .. 관여적 주체는 관계망 속에서 발생되는 '우리 중 어느 누군가'를 말한다. 공동체 속에서의 관여적 주체는 '너와 나 사이에서의 흐름', '너이면서도 나인 흐름', '네 것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닌 공통재를 만드는 흐름'에 따른 사이주체성을 의미한다..
.. 주체(subject)가 아닌 주체성(subjectivity)을 생산해야 하는데, 어떤 역할, 기능, 직분에 따라 자동적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을 해 낼 사람이 미리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주목해야 하고, 그 일을 해낼 주체성은 관계의 성숙과 특이성 생산을 통해서 만들어 나가야 하며, 발생되고, 출현되어야 한다. 주체성 생산을 통해서 관여적 주체를 만들어나가는 촉매재가 바로 욕망이라고 말하고 싶다..
.. 우리가 직면한 다양한 문제가 되는 지점인 입구와 우리를 해방시키고 자율적으로 만들 출구는 다를 수 있다. 우리가 도주선을 타고 절대적 변주로 향할 때 욕망은 창조하고 생산하면서 '무의식의 공장'을 힘차게 작동시킬 것이다..